-309-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서 확고한 자제와 엄격한 절제와 쇠하지 않는 열심의 중요성을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감명시켜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싸움을, 고린도 가까이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렸던 유명한 경주에 비교하였다.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성행하는 모든 경기 중에서 경주는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높이 평가되었다. 왕과 귀족들과 정치가들이 경주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신분이 높고 부요한 청년들이 경주에 가담하였고 그들은 상을 얻기에 필요되는 노력이나 훈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이 경기들은 항의할 수 없는 엄격한 규칙들로 통제되었다. 상을 얻기 위하여 경쟁자로 그 이름을 등록하고자 하는 자들은 먼저 엄격한 준비 훈련을 받아야 하였다. 해로운 식욕의 방종이나 지적 혹은 육체적 활력을 저하시킬 어떤 다른 만족이라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 힘과 속도의 시험에서 성공하려는 소망을 가진 자들은 근육이 강인하고 유연해야 하며 신경들이 잘 통제되어야 한다. 모든 동작은 분명해야 하고 매 발걸음은 신속하고 빗나가지 말아야 하며 체력은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여야 한다.
-310-
경주자들이 기다리는 군중들 앞에 나타나면 그들의 이름이 공고되고 경기 규칙이 분명히 설명되었다. 그 후에 그들은 모두 함께 출발하였고 관중들의 주목은 이기겠다는 결심을 갖도록 그들을 고무시켰다. 심판관들은 결승점 가까이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경기를 지켜보고 올바른 승리자에게 상을 줄 수 있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불법적으로 제일 먼저 결승점에 도달하였다면 그는 상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기에는 큰 위험이 따랐다. 어떤 이들은 무서운 육체적 긴장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도중에 넘어져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때때로 어떤 경주자는 거의 입상권에 들었을 때 넘어져 죽었다. 그러나 평생 불구가 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달리는 이에게 크게 위험으로 여겨지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성공적인 경주자에게 명예로운 보상이 주어지는 까닭이었다.
승리자가 결승점에 도달할 때 수많은 관중들의 박수갈채는 대기를 찢고 인근 언덕과 산에 메아리쳤다. 관중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심판관은 그에게 승리의 표상인 월계관을 주고 그의 오른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려주었다. 그를 찬양하는 노래가 온 나라 안에 들렸고 그의 부모도 영광을 나눠 받았으며, 그가 사는 도시까지도 그처럼 위대한 운동가를 배출한 까닭에 크게 높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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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싸움에 대한 상징으로서 이 경기를 언급한 바울은 경기에 임한 경주자들의 성공에 필요한 준비, 곧 예비 훈련, 절식(節食), 절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선언하였다. 경주자들은 체력을 약화시킬 모든 방종을 버리고 엄격하고도 계속적인 훈련으로 근육을 강인하게 훈련시킴으로, 경기 당일에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영원한 이익이 걸려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식욕과 정욕을 이성과 하나님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인가! 그리스도인은 결코 오락과 사치와 안일로 인하여 그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그의 모든 습관과 정욕은 가장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의하여 계발되고 그분의 성령의 지도를 받는 이성이 마음의 고삐를 잡아야 한다.
이렇게 한 후에 그리스도인은 승리를 얻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린도인의 경기에서, 경주자들의 최후의 몇 걸음은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도 결승점에 가까이 이를 때, 처음 시작할 때보다도 한층 더 단호한 결심과 열심으로 앞으로 나아 갈 것이다.
바울은 경주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시드는 월계관을 그리스도인 경주에서 승리한 이에게 주어질 불멸의 영광의 면류관과 대조한다. 바울은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선언한다. 헬라의 경주자들은 썩을 상을 얻기 위하여서도 어떤 수고나 단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무한히 귀중한 상, 곧 영생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더 주의 깊이 노력해야 하며 얼마나 더 자발적으로 희생하며 극기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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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영생을 위한 그리스도인 경주의 특징을 나타내는 성실한 목적이 다음과 같이 지적되어 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 2). 시기심, 악의, 악한 생각, 악한 말, 탐심,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이 불멸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성공적으로 경주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버려야 할 무거운 짐들이다. 죄악으로 인도하고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모든 습관이나 행위는 어떠한 희생을 하더라도 반드시 버려야 한다. 영원한 의의 원칙들을 범하는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하늘의 축복은 함께할 수 없다. 마음속에 품은 한 가지 죄는 품성을 타락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에 넉넉하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45). 몸을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발이나 손을 잘라 버리거나 눈까지도 뽑아 버려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악을 버리기 위하여 얼마나 더 열심을 내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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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경기에서 경쟁자들은 극기와 엄격한 훈련을 받은 후에도 승리가 보장되지 아니하였다.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경주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할지라도 한 사람밖에 상을 받을 수 없다. 한 사람만이 탐내던 화관을 취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상을 얻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나 그들이 그것을 얻으려고 손을 내밀 때, 바로 그들 앞에서 다른 사람이 그 탐하던 보물을 붙잡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인 싸움의 경우는 그와 같지 아니하다. 조건들을 갖춘 사람은 한 사람도 경기 끝에 실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열렬하고 끈기 있는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경기는 빠른 사람의 것이 아니요, 싸움은 강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가장 강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장 약한 성도도 불멸의 영광의 면류관을 쓸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통하여 그들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시키는 사람들은 모두 승리할 것이다. 생애의 세세한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원칙들을 실행하는 것은 너무도 흔히 중요하지 않은 일로 간주된다. 곧 주목을 끌기에는 너무도 사소한 문제로 취급된다. 그러나 운명이 걸린 문제라는 점에서 볼 때, 도움이나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행위는 생애의 승리나 패배를 결정하는 저울에 그 무게를 더한다. 그리고 승리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그들이 기울인 힘과 열심에 비례할 것이다.
-314-
사도는 자신을 경주에서 상을 얻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달리는 사람에 비유하였다.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 경주에서 방향 없이 달리거나 되는 대로 달리지 아니하려고 바울은 자신을 엄격한 훈련에 복종시켰다. “내 몸을 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엄격한 훈련으로 욕망과 충동과 정욕을 격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하지나 아니할까 두려워하였다. 바울은 만일 그가 믿고 전파한 원칙들을 자신의 생애에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의 노력은 헛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말과 감화와 자아 만족에 빠지기를 거절하는 태도는 그의 신앙이 단순한 선언만이 아니요 날마다 하나님과 산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하였다. 그가 언제나 바라고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 한 가지 목표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였다”(빌 3:9).
바울은 악에 대한 그의 투쟁이 생명이 지속되는 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세속적 욕망이 영적 열심을 이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항상 엄격히 경계해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타고난 성벽과 싸우기를 계속하였다. 언제나 그는 그의 앞에 도달하여야 할 이상을 간직하였고 하나님의 율법을 즐겨 순종함으로 이 이상에 도달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말과 행실과 정욕,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 아래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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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의 생애에서 영생을 위한 경주에서 승리하려는 성실한 목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기 원하였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생애의 투쟁이 그들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그들이 날마다 경건과 도덕적인 탁월함을 구하며 법대로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의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라고 호소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순종할 때는 축복의 보상을 받고 범죄할 때는 형벌을 받은 고대 이스라엘의 경험을 지적하였다. 그는 히브리인들이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의 보호를 받아 애굽에서 나온 기이한 방법에 대하여 그들에게 생각나게 하였다. 그와 같이 그들은 홍해를 안전히 건넜으나, 반면에 애굽인들은 같은 방법으로 건너려고 시도하다가 모두 익사하였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셨다. 그들은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모든 여행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지도자로 모셨다. 침을 당한 반석은 그리스도를 예표하였으니, 그는 사람들의 범죄로 인하여 상함을 받으셔서 구원의 시내가 만민에게 흐를 수 있게 하셔야 하였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보이신 은총에도 불구하고, 애굽에 두고 온 사치에 대한 갈망과 그들의 죄와 반역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의 경험에 내포된 교훈을 주의하도록 명하였다. 그는 선언하기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는 안일과 향락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의 현저한 징벌을 초래하는 죄악을 위한 길을 준비하였는지를 보여 주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을 때 느꼈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던져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의 신으로 삼고 경배한 것은 그들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 때였다. 많은 히브리인들이 방탕에 빠졌던 것은 바알브올의 예배와 관련된 호화스러운 잔치에 참석한 후였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일어났고 그분의 명령으로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염병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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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간원하였다. 저희가 깨어 기도하기를 게을리하고 자랑하고 거만하게 된다면 그들은 중한 죄에 빠지고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로 실망이나 낙담에 빠지게 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보증을 그들에게 주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바울은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칠 것인지를 스스로 살펴서 그 자체는 무죄할지라도 우상숭배를 시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거스리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도록 형제들에게 간청하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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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의 경고의 말은 각 시대에 모두 적용되나 특히 우리 시대에 적용된다. 그가 의미하는 우상숭배는 신상을 숭배하는 것만이 아니요 자신을 섬기는 것, 안일에 대한 사랑, 식욕과 정욕의 만족을 다 의미한다. 다만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진리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목과 기호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며 방종을 시인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종교가 아니다.
사도는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함으로써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교인들 사이에 존재해야 할 긴밀하고 조화된 관계를 적절하게 예증하였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318-
그 다음에, 바울은 그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남녀들에게 영감과 격려의 근원이 되어 온 말로써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품어야 할 사랑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의 공언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그 동료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지 아니한 사람은 참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비록 큰 믿음을 가지고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졌다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신앙은 무가치할 것이다. 그가 크게 관대함을 나타낼지라도, 진정한 사랑 외에 어떤 다른 동기로 그의 모든 소유를 주어 가난한 사람들을 먹인다면 그 행위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열심으로 그가 순교자의 죽음을 당한다할지라도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혹을 당한 광신자나 야심만만한 위선자로 여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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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한다. 가장 순결한 기쁨은 가장 깊은 겸비에서 솟아오른다. 가장 강하고 가장 고상한 품성은 인내와 사랑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의 기초 위에 건설된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동기와 행위에 가장 좋은 해석을 가한다. 이것은 쓸데없이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지도 아니하고 불리한 보고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좋은 품성들을 기억하고자 노력한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 이것은 하늘의 속성이기 때문에 결코 그 가치를 잃지 아니한다. 귀중한 보배처럼 그 소유자는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성의 문을 통과할 것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의 신도들 중에 도덕적 수준이 저하됨에 따라서 그들의 신앙의 기본적인 어떤 부분들을 포기하는 자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부활의 교리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분명한 증거에 관한 명백한 증언으로 이 이단에 대처하였다. 바울은 선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하였다.
-320-
사도는 수긍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부활의 대진리를 진술하였다. 사도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도는 고린도 형제들의 마음을 부활의 아침에 있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때는 자는 성도들이 모두 부활하여 그들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사도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선언하였다.
-321-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승리는 영광스럽다. 사도는 고린도 신자들이 그들 앞에 있는 가능성들을 깨닫고 이기적인 사람들과 육욕적인 사람들을 떠나 영원불멸의 소망으로 생애를 영화롭게 할 것을 그들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호소하였다.
이와 같이 사도는 가장 단호하고 감명 깊은 방법으로 고린도 교회 중에 유행하고 있는 거짓되고 위험한 사상과 행습을 시정하고자 노력하였다. 노골적으로 말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말하였다. 그의 경고와 책망 가운데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오는 빛이 그들에게 비치어 그들의 생애를 더럽히고 있는 감추인 죄악들을 드러내었다. 이 빛이 신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던가?
그 편지를 부친 후 바울은 그가 기록한 것이 그가 덕을 베풀고자 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깊은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는 더욱더 사이가 벌어질 것을 심히 두려워하여 때때로 그의 말을 철회하기를 원하였다. 사도처럼 사랑하는 교회나 기관들에 대하여 책임을 느낀 이들은 그의 정신적 의기소침과 자책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위한 그분의 사업의 짐을 진 하나님의 종들은 대사도의 몫으로 주어졌던 수고와 투쟁과 애타는 염려에 대하여 알 것이다. 교회 가운데 있는 분열로 번민하고, 그가 동정과 지지를 보낸 사람들 중 어떤 이들로부터 배은망덕과 배반을 당하며, 악이 잠복하고 있는 교회들의 위험을 깨달음으로 죄를 책망하는 면밀하고 엄중한 증언을 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와 동시에 그는 그가 너무나 가혹하게 다루지나 아니하였나하는 두려움으로 가슴이 무거웠다. 그는 근심에 떨면서 그의 기별을 받은 곳으로부터 어떤 소식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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