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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처럼 개신교의 교리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인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또 이곳처럼 개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무서운 박해를 당한 나라도 드물다. 독일에서는 카알 5세가 개혁주의를 금지하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처형시키고자 하였으나 제후들이 그의 학정을 막았다. 네덜란드에서는 그의 권력이 더욱 컸으며, 박해의 명령이 신속히 뒤를 이어 발해졌다. 성경을 읽는 것, 그 말씀을 듣거나 전하는 것, 심지어 그것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까지도 화형에 처할 만한 죄라고 하였다. 은밀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 또는 시편을 노래하는 것도 사형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자기의 잘못을 버리기로 맹세한 자들도 정죄의 선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남자들인 경우는 검으로 죽이고, 여자들인 경우는 산 채로 매장하여 죽였다. 카알과 필립 2세의 치하에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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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미사 때에 나오지 아니하고 가정에서 예배하였다는 죄로 한 가족이 종교 재판관들 앞에 끌려나온 일이 있었다. 은밀히 기도한 것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때 제일 어린 아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우쳐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또 왕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그의 시대가 번영하고 그의 일생이 행복해지기를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부의 관리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Wylie, b.18, ch.6). 재판관들 중의 몇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 가정의 아버지와 아들 중의 한 사람은 화형을 선고받았다.
박해가 점점 심하여짐에 따라 순교자들의 신앙도 더욱 강하여졌다. 남자뿐만 아니라 연약한 부인들과 소녀들까지도 확고한 용기를 나타냈다. “아내들은 남편들이 달려 있는 화형주 곁에 서서 불에 타고 있는 남편들에게 위안의 말을 들려주거나 시편을 노래로 불러 주기도 하였다.” “어린 처녀들은 마치 밤에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처럼 산 채로 조용히 무덤에 들어가 누웠고, 혹은 결혼식에 나아가는 신부처럼 좋은 옷을 입고 교수대나 화형장에 나아가기도 하였다” (Wylie, b.18, ch.6).
다신교가 복음을 박멸하고자 노력하였던 시대와 꼭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앗이 되었다 (Tertullian, Apology, Paragraph 50 참조). 박해는 진리의 증인들의 수를 증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백성들의 정복하기 어려운 결심을 보고 광적 (狂的) 상태가 되어버린 왕은 해가 거듭될수록 잔악한 일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렌지 (Orange) 공 윌리엄의 지도하에 혁명이 일어나서 네덜란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유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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