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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왕당의 계책으로 열린 회의

토론은 바덴 (Baden) 에서 하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취리히의 의회는 법왕당의 계획을 의심하게 되었고, 또한 믿노라고 고백한 사람들에 대하여 법왕의 교구에서 화형에 처한다는 경고를 받았으므로 그들의 목사를 이와 같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금하였다. 취리히에서는 로마에서 파견된 아무리 당파심이 강한 사람과도 만날 준비가 그에게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하여 흘린 순교자의 피가 아직도 마르지 아니한 바덴으로 가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침내 에콜람파디우스 (Ecolampadius) 와 할러 (Haller) 가 개혁파를 대표하여 출석하게 되었고, 한편으로 많은 유식한 박사들과 주교들의 지지를 받는 에크 (Eck) 박사가 로마측의 대표로 서게 되었다.

비록 츠빙글리가 그 곳에 출석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위력은 회의석까지 미쳤다. 서기는 전부 법왕당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그 이외의 사람은 필기를 못하도록 금지되어서 이를 범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기로 되었다. 그럴지라도 츠빙글리는 매일 바덴에서 어떠한 것이 토론되었는지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받았다. 토론장에 출석한 한 학생은 매일 저녁 그날에 있었던 토론에 관한 기록을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다시 다른 두 학생으로 말미암아 에콜람파디우스의 편지와 함께 날마다 취리히에 있는 츠빙글리에게 전달되었다. 동시에 츠빙글리는 거기에 대한 회답으로 적당한 조언 (助言) 과 권고를 보내었다. 그의 글은 밤에 기록되었는데, 연락하는 학생들은 그것을 가지고 이튿날 아침 바덴으로 돌아왔다. 도시의 문을 지키는 파수꾼을 피하기 위하여 그 심부름꾼들은 가금 (家禽) 을 넣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들어갔으므로 아무런 지장이 없이 잘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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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교활한 대적과 싸울 수 있었다. 뮈코니우스 (Myconius) 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명상과 철야와 바덴으로 보낸 조언 (助言) 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직접 원수들의 진중에서 토론한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일을 하였다” (D’Aubigne, b.11, ch.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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