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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측과 개혁파 제후들과의 대립

“우리는 이 법령을 부인하기로 하자. 적어도 양심 문제에 관하여서는 다수가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제후들은 말하였다. 그리고 대의원 (代議員) 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가 국가의 평화를 누리는 것은 1526년의 칙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를 폐지하는 것은 온 독일을 분쟁과 혼란 가운데 빠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회는 전체 회의가 열리기까지는 신교의 자유를 보존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D’Aubigne, b.13, ch.5).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그러나 종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 권한이 제한되어 있다. 모든 정부가 국가의 권위로써 종교의 의식을 규정하거나 강요하려고 하는 것은 복음파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고귀하게 투쟁해서 지키려고 한 바로 그 원칙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법왕당은 그들이 소위 “대담한 고집”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들을 멸절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먼저 개혁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자 노력하고, 다음에는 아직 공공연하게 개혁파의 호의를 보이지 아니한 사람들을 협박하였다. 각 자유시의 대표들은 마침내 국회에 호출되어 그 법령의 조건들에 순종 여부를 나타내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들은 시간의 여유를 달라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시험이 제시되자 거의 반수 가량은 개혁자의 편에 가담하였다. 그 사람들은 양심의 자유와 각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는 권리를 희생하기를 거절함으로 장차 비난과 정죄와 박해의 표적 (標的) 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의원 중의 한 사람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화형을 받든지 둘 중 하나를 취하고야 말 것이다” (D’Aubigne, b.13, ch.5) 고 말하였다.

황제의 대표자로 회의에 임석한 페르디난트 (Ferdinand) 왕은 제후들이 법령을 승인하고 지지하는 데 가담하지 않는다면 심상치 않은 분열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 그러나 폭력을 사용하면 그들의 결심을 한층 더 굳게 해줄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들을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제후들이 법령을 승인해 주기를 빌면서 황제가 그들을 참으로 기뻐할 것이라고 보증하였다.” 그러나 그 충성된 제후들은 세상 통치자들이 가진 권위 이상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영광과 평화를 유지하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D’Aubigne, b.13, ch.5) 고 조용히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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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에서, 왕은 마침내 선후와 그의 동료들을 향하여 이 포고는 “황제의 칙령의 형식을 취하여 작성된 것이므로 오직 한 가지의 길은 중의 (衆議) 에 복종하는 것밖에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말을 마치자 개혁자들에게 고려할 기회나 대답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아니하고 퇴장하였다. 뜻밖의 일이었으므로, 그들은 몇 사람의 사자를 보내어 왕이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오도록 간청하였다. 그들의 간청에 대하여 그는 “그것은 이미 해결된 문제이다. 이제 남은 것은 복종하는 것뿐이다” (D’Au-bigne, b.13, ch.5) 고 대답하였다.

황제측에서는 그리스도인 제후들이 사람의 교리 (敎理) 와 사람의 요구보다 성경을 주장하여 굳게 지킬 것을 알았고, 또한 이 원칙이 인정되는 곳은 어디에서나 법왕교가 마침내 무너지고 말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시대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은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았으므로, 황제와 법왕의 사업은 강하고 개혁자의 사업은 약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만하였다. 개혁자들이 사람들의 힘만을 의지하였다면 법왕당이 생각했던 바와 같이 그들은 무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수는 적고 로마와도 불화한 사이였을지라도 그들은 그들대로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 의회의 결의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카알 황제보다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D’Aubigne, b.13, ch.6) 더욱 신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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