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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더욱 큰 권력을 주기 위하여 종교 재판소를 다시 세우라는 교서가 내렸다 (부록 18 참조). 일반 사람들이 가증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국가들에서까지도 부당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서운 재판소가 법왕교의 위정자들로 말미암아 설치되고, 백주에는 너무 무서워서 차마 볼 수 없는 고문이 아무도 볼 수 없는 옥중에서 반복하여 감행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국가의 꽃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 순결하고 고상한 사람들, 가장 지성적이고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 경건하고 헌신적인 목사들, 부지런하고 애국적인 시민들, 탁월한 학자들, 천재적인 예술가들, 기술 있는 직공들이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교는 종교개혁의 빛을 꺼버리고, 인류에게서 성경을 빼앗고, 암흑시대의 무지와 미신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여러 가지 방책들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께서 루터를 이어서 일으켜 주신 고귀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개신교는 전복되지 아니하였다. 개신교의 힘은 왕족들의 호의나 권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가장 작고 비천하고 무력한 나라들이 그 요새 (要塞) 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승리를 얻은 나라들은 멸망을 도모하고 있는 강한 원수들에게 둘려 있는 작은 도시 제네바, 당시에 가장 크고 부요하였던 스페인의 학정에 항거하고 있던 네덜란드, 황량하고 메마른 스위스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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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약 30년간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다. 거기서 처음에는 성경상 원칙을 고수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그 다음에는 온 유럽에 종교개혁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공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행위와 그의 가르침에는 그릇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세계에 필요한 진리를 공포하고, 법왕교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서 개신교의 원칙을 지탱하고, 로마교의 교리에서 자라난 교만과 부패 대신에 단순하고 순결한 생명을 개혁 교회에 부식시켜 주는 도구가 되었다.
제네바에서부터 출판물들과 교사들이 개신교의 교리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나갔다. 거기에서 각국의 핍박자들은 교훈과 권면과 격려를 기대하였다. 칼빈의 시 (市) 제네바는 쫓겨 다니던 서유럽의 개혁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몇 세기에 걸쳐서 계속된 무서운 폭풍을 피하여 망명자들은 제네바를 찾아왔다. 굶주리고, 상처받고, 집과 친족을 잃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따뜻한 영접을 받고 친절한 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안식처를 발견한 그들은 그들의 기능과 학식과 신앙을 활용함으로 그 도시를 복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피난처를 발견했던 많은 사람들은 로마교의 학정을 저항하기 위하여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개혁자 존 녹스, 영국의 많은 청교도들,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교도들은 모두 암흑한 본국들을 밝히기 위하여 제네바에서 진리의 횃불을 들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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